제3장 세종의 시대 - 제도의 완성 [p.111-180]
세종대 32년(1418-1450)은 조선 518년 중 가장 밀도 높은 개혁기다. 태조가 나라를 만들고 태종이 뼈대를 세웠다면, 세종은 그 뼈대에 살과 피를 채워 국가를 완성했다. 이 시기에 조선의 영토, 문자, 과학, 세제, 외교가 모두 확정되었다. 그래서 세종을 '성군'으로만 보면 안 된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운영체제의 최종 버전을 만든 시스템 엔지니어였다.
3.1 집현전: 조선의 싱크탱크 p.111-125
집현전이란 무엇인가
집현전은 1420년(세종 2) 세종이 경복궁 안에 설치한 학술 연구 기관이다. 정원 20명의 젊은 학자들이 24시간 궁궐에 상주하며 오직 연구와 정책 자문만 했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국립과학원+국사편찬위원회를 합친 곳이다.
왜 만들었나.
태종은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왕이 모든 결정을 직접 하다 보니, 왕의 능력이 곧 국가의 능력이 되었다. 왕이 무능하면 국가가 무너지는 구조였다. 세종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왕의 판단을 도울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것이 집현전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의 업무는 세 가지였다.
- 경연: 매일 아침 왕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한다.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경전의 구절을 가지고 현실 정책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예컨대 <서경>의 "민유방본(民惟邦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을 읽고, "그럼 백성을 위한 세제는 무엇인가"를 토론했다.
- 편찬: 국가의 모든 책을 만든다. <삼강행실도>,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고려사> 등 세종대 편찬된 50여 종의 책은 모두 집현전 작품이다.
- 자문: 왕이 정책을 결정하기 전, 집현전에 먼저 묻는다. 예컨대 4군6진 개척 당시, 세종은 집현전에 "북방 개척이 옳은가"를 물었고, 집현전은 찬반 양론을 보고서로 제출했다.
집현전의 인간들
집현전은 신분 상승의 사다리였다. 정원 20명 중 절반은 지방 출신 중소 지주 자제였다. 과거 급제 후 집현전에 발탁되면, 3년간 세금과 잡역을 면제받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가 있었다.
대표 인물:
- 최만리: 집현전 부제학. 훈민정음 반대론자.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면 오랑캐가 된다"는 논리로 반대했다가 유배되었다. 집현전이 단순한 찬양 기구가 아니라 비판 기구였음을 보여준다.
- 정인지: 집현전 대제학. <용비어천가>와 <고려사> 편찬. 세종의 오른팔.
- 박연: 악학(음악) 전문가. 종묘제례악을 정리했다.
- 장영실: 노비 출신 과학자. 집현전은 아니지만, 집현전의 과학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신분제를 넘어선 인재 등용의 상징.
집현전은 1456년 세조의 단종 복위 운동(사육신) 이후,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지지하다 처형되며 폐지되었다. 36년간 존재했지만, 조선의 모든 제도가 이 36년간 만들어졌다.
집현전의 의의.
집현전은 조선이 왜 관료제 국가인지를 보여준다. 왕 한 명의 천재성이 아니라, 20명의 집단 지성이 국가를 운영한 모델. 세종은 천재였지만, 천재의 한계를 알고 시스템을 만들었다. 집현전이 없었다면 훈민정음도, 측우기도, 칠정산도 없었다.
3.2 훈민정음 1443 창제와 1446 반포 - 문자 혁명의 정치학 p.126-145
왜 문자를 만들었나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는 "백성을 위해서"라는 <훈민정음 서문>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 행정 효율성: 조선의 모든 문서는 한문으로 쓰였다. 그러나 백성의 90%는 한문을 몰랐다. 백성이 소장을 제출해도 관리는 읽을 수 없고, 관리가 공문을 내려도 백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국가와 백성 사이의 소통 단절. 세종은 "백성이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한다"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 자주성: 명나라는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다. 조선이 명나라의 문자(한문)를 쓰는 한, 문화적 속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독자적 문자는 정치적 독립 선언이었다.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명나라에 보고하지 않고 3년간 비밀리에 실험했다. 명나라의 눈치를 본 것이다.
- 왕권 강화: 한문은 사대부만 아는 문자였다. 사대부는 한문을 독점함으로써 왕과 백성 사이를 중개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과 직접 소통함으로써 사대부의 중개권을 약화시키려 했다. 문자는 권력이다.
어떻게 만들었나 - 1443-1446 3년간의 비밀 프로젝트
1443년 12월, 세종은 측근 10여 명(정인지, 최항, 박팽년 등)에게 비밀리에 훈민정음 창제를 지시했다. 집현전 전체에도 알리지 않았다.
창제 원리는 <훈민정음 해례>에 자세히 나온다.
- 자음 17자: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떴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 세계 문자 중 유일하게 창제 원리가 과학적으로 설명된 문자다.
- 모음 11자: 천·지·인 삼재(三才) 철학. 하늘(ㆍ), 땅(ㅡ), 사람(ㅣ)의 조합으로 모든 모음을 만들었다.
- 합성: 자음과 모음을 합쳐 글자를 만든다. 예: ㅎ+ㅏ+ㄴ = 한.
1443년 12월 창제 후, 세종은 3년간 실험했다. 궁녀와 내시들에게 먼저 가르쳐 보았다. 1446년 9월, <용비어천가>를 훈민정음으로 적어 시험 인쇄한 뒤, 1446년 10월 9일(현재 한글날)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왜 반대했나 - 최만리의 상소
반포 직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 7명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면 오랑캐와 같아집니다. 한문을 버리고 언문을 쓰면 유교 경전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백성이 글을 알게 되면 소송이 늘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이 상소는 3가지 두려움을 보여준다.
- 사대주의: 중국과 달라지면 오랑캐가 된다는 공포.
- 기득권: 한문을 독점한 사대부의 권력 상실 공포.
- 백성에 대한 불신: 백성이 똑똑해지면 다스리기 어렵다는 공포.
세종은 이 상소를 모두 반박하며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훈민정음 사용을 강제했다. 그러나 세종 사후, 훈민정음은 400년간 천대받았다. 양반들은 "언문(諺文, 낮은 글)"이라 부르며 쓰기를 거부했고, 한글은 여성과 중인, 승려의 문자로 남았다. 한글의 역전은 19세기 말에야 이루어졌다.
문자 혁명의 정치학.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권력 투쟁의 도구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사대부를 견제하며, 명나라로부터 문화적 독립을 선언하는 도구. 세종은 문자를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의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하려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훈민정음은 500년 뒤, 조선이 망한 뒤에도 남아 한국인의 정체성이 되었다.
3.3 과학기술사: 측우기, 혼천의, 갑인자, 칠정산 p.146-160
세종대는 과학기술의 황금기다. 장영실, 이천, 김담 등 기술관료들이 대거 등장했다. 세종은 기술을 애국으로 보았다.
천문학 - 하늘의 시간을 지배하다
- 혼천의(渾天儀, 1433):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기. 장영실 제작. 세종은 혼천의를 통해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고 싶어 했다. 명나라 역법을 그대로 쓰면, 조선의 시간도 명나라가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칠정산(七政算, 1442): 이순지, 김담이 만든 조선 독자 역법. 태양, 달, 5행성의 운행을 계산. 3년간의 관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중국 역법보다 정확했다. 칠정산으로 조선은 명나라와 다른 독자적 시간 체계를 갖게 되었다. 시간의 독립.
- 해시계, 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궁궐뿐 아니라 한양 곳곳에 설치하여 백성이 시간을 알 수 있게 했다. 시간을 국가가 통제한다는 의미.
기상학 - 세계 최초의 우량계
- 측우기(測雨器, 1441): 세계 최초의 표준화된 우량계. 세종 23년 4월, 가뭄이 들자 세종은 "전국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신하들은 "논이 젖은 정도로 안다"고 답했다. 세종은 "그건 주관적이다. 표준화된 그릇으로 재자"고 지시했다. 높이 30cm, 지름 15cm의 표준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 8도에 배포했다. 매일 강수량을 측정하여 보고하게 했다. 이는 세계 기상 관측 사상 최초의 전국 네트워크다. 유럽보다 200년 빠르다.
- 풍기(風旗): 풍향, 풍속 측정기.
인쇄술 - 갑인자(甲寅字, 1434)
세종은 책을 많이 찍고 싶어 했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있었지만 글자가 작고 불규칙했다.
갑인자는 구리활자로, 글자 크기를 2배로 키우고 글자체를 정자체로 통일했다. 갑인자로 찍은 책은 가독성이 뛰어나 백성도 읽을 수 있었다. 세종대 50여 종의 책이 갑인자로 간행되었다. <농사직설> 같은 농업 기술서는 전국에 배포되어 농업 생산성을 높였다.
과학기술의 정치학.
세종의 과학은 순수 과학이 아니었다. 모두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 천문학 = 시간의 독립 (명나라로부터)
- 측우기 = 세금의 공정성 (강수량에 따라 세금을 감면)
- 갑인자 = 지식의 보급 (백성이 책을 읽게 함)
세종은 과학을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의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세종대 조선의 조세 징수 효율은 고려의 2배였다.
3.4 대마도 정벌과 4군 6진 개척 - 영토의 완성 p.161-170
세종대 조선의 영토가 현재 한반도 영토로 확정되었다.
대마도 정벌 1419 - 왜구 소탕인가 영토 확장인가
세종 즉위 1년, 1419년 6월. 세종은 이종무에게 1만 7천 군사를 주어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명분은 왜구 소탕. 그러나 실제로는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벌군은 대마도 주민 700명을 죽이고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대마도주는 조선에 항복하며 매년 세곡을 바치기로 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항이 되며, 조선의 통제를 받았다.
대마도 정벌의 의의는 조선이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조선은 대륙 국가이면서도 해군을 가진 국가였다.
4군 6진 개척 1433-1449 -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
세종대의 최대 업적은 북방 개척이다.
고려의 북방 경계는 청천강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은 여진족의 땅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었고, 세종은 이를 조선 영토로 편입하려 했다.
4군 개척 (압록강): 1433년 최윤덕, 이천 등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여연, 자성, 무창, 우예 4개 군을 설치. 현재 자강도 지역.
6진 개척 (두만강): 1433-1449년 김종서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경원, 경흥, 종성, 온성, 회령, 부령 6개 진을 설치. 현재 함경북도 지역.
개척 과정은 잔혹했다. 여진족 마을을 불태우고, 여진족을 죽이거나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여진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종은 "회유하라"고 지시하며 갈등했다. 결국 6진 지역 여진족 1만여 명이 조선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영토 확정의 의의.
4군6진으로 조선의 영토는 현재 남북한 전체 영토와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 된 것은 세종대부터다. 이후 500년간 조선의 북방 경계는 변하지 않았다.
또한 4군6진은 국방뿐 아니라 경제적 의미도 있었다. 함경도 지역의 금, 은, 삼림 자원을 확보했고, 여진족과의 무역을 통해 말과 모피를 얻을 수 있었다.
3.5 황희, 맹사성, 김종서 - 관료제의 이상형 p.171-176
세종대는 인재의 시대였다. 태종이 만든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할 관료들이 필요했고, 세종은 그들을 등용했다.
황희(黃喜, 1363-1452) - 24년간 영의정
황희는 고려 말부터 세종까지 60년간 관료로 산 인물이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명의 왕을 섬겼다. 24년간 영의정을 하며 조선 관료제의 기틀을 다졌다.
황희의 리더십은 "무사(無事)"였다. 일을 만들지 않고,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 그는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업무를 보고, 저녁 10시까지 일했다. 뇌물을 받지 않았고,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세종은 황희를 "우리 집안의 늙은 소"라 부르며 신뢰했다.
황희가 만든 관료제 원칙:
- 서류로 말한다. 구두 보고 금지.
- 3번 검토한다. 6조-의정부-왕 3단계 검토.
- 선례를 따른다.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 - 청백리
맹사성은 황희와 대조되는 인물. 청렴결백의 상징. 우의정을 지내며 평생 재산이 없었다. 그의 집은 초가집이었고, 옷은 10년을 입었다.
맹사성은 세종에게 "임금은 백성의 부모다"를 강조했다. 세금을 올리자는 주장에 "백성이 굶는데 어찌 세금을 올리냐"며 반대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 - 무인의 이상형
김종서는 문관 출신이지만 6진을 개척한 무장이다. 문무를 겸비한 관료. 세종은 김종서에게 "너는 나의 곽자仪(중국 명장)다"라고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세조)에게 살해되었다. 문관으로 무공을 세운 자의 비극.
세 인물이 보여주는 것.
황희(제도), 맹사성(도덕), 김종서(실행). 세종은 이 세 유형의 관료를 조화시켜 국가를 운영했다. 조선 관료제의 이상형은 황희처럼 제도대로, 맹사성처럼 청렴하게, 김종서처럼 실행력 있게 일하는 것이었다.
3.6 세종대 북방정책과 대명외교의 이중주 p.177-180
세종대의 외교는 이중주였다. 겉으로는 명나라에 사대하고, 속으로는 북방을 개척하며 자주성을 키웠다.
사대교린(事大交隣) - 명나라와 여진
조선의 공식 외교 노선은 사대교린. 큰 나라(명나라)는 섬기고, 이웃(여진, 일본)과는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대명외교 - 겉으로는 사대, 속으로는 자주
세종은 명나라에 매년 3차례 사신을 보냈다. 조공을 바치고,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명나라를 견제했다.
- 역법 독립: 칠정산을 만들어 명나라 역법과 다른 독자 역법을 사용했다. 시간의 독립.
- 문자 독립: 훈민정음을 만들어 명나라 문자와 다른 독자 문자를 만들었다. 문화의 독립.
- 영토 독립: 명나라는 4군6진 개척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명나라는 여진족을 자신의 속국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세종은 명나라의 항의를 무시하고 개척을 강행했다.
북방정책 - 여진에 대한 포용과 배제
여진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책을 썼다.
- 회유: 귀화한 여진족에게는 조선 백성과 같은 대우를 하고, 토지와 관직을 주었다. 6진 지역 여진족 1만 명은 조선 호적에 편입되었다.
- 정벌: 귀화하지 않은 여진족은 토벌했다. 1437년 김종서는 여진족 200여 명을 살해했다.
세종은 여진족을 "우리 백성이 될 수 있는 자"와 "적이 될 자"로 나누어 다르게 대했다. 이는 현대의 다문화 정책과 유사하다.
이중주의 성공.
세종대 조선은 명나라와 전쟁 없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2배로 넓혔다. 사대라는 명분으로 명나라의 간섭을 피하고, 그 사이 자주적 개척을 한 것이다. 세종의 외교는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명분을 이용해 실리를 취한 외교였다.
세종 사후, 조선은 더 이상 영토를 넓히지 못했다. 4군6진은 조선 영토의 최종판이었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영토, 문자, 과학, 제도를 모두 완성하고 1450년 2월 17일,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은 문종은 2년 만에 죽고, 조선은 계유정난이라는 내전으로 들어간다. 완성된 제도는 왕권 다툼 속에서 시험받게 된다.